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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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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는 6.25 전쟁 중 대전 전투에서 군수물자 후송 작전에 투입된 미카 3형 증기기관차를 잘못 지칭하여 발생한 논란과 관련된 문서이다. 김재현 기관사를 비롯한 철도 공무원들은 미카 3-219호 기관차를 이용하여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했으나, 이후 미카 3-129호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는 오류가 발생했다. 또한,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옥천역 복귀 운전자 등에 대한 기록이 상이하게 알려져 역사 왜곡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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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의 전경.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의 전경.
이름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
지정 번호415
지정일2008년 10월 17일
소재지대전광역시 유성구 현충원로 251 (국립대전현충원 호국철도기념관)
소유자한국철도공사
참고미카형 증기기관차

2. 한국전쟁과 대전 전투 투입

1940년 일본에서 제작된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는 6.25 전쟁 당시 대전 전투에 투입되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는 이 기관차를 운전하여 미 제24보병사단의 보급품 후송 작전에 투입되었다.[1][2][3] 하지만 실제 작전에 사용된 기관차는 미카3-129호가 아닌 미카 3-219호였다.[1][2][3]

당시 대전은 북한군에 포위되어 미 제24보병사단은 긴급히 보급품을 후송해야 했다. 이 작전에서 김재현 기관사 등이 활약했지만, 김재현 기관사는 순직하고 현재영 보조기관조사는 부상을 당했다.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는 2008년 10월 17일 국가등록문화유산 제415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대전현충원 내 호국철도기념관에서 야외 전시 중이다.

2. 1. 대전 전투의 배경과 전개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발발 후, 미국은 미 제24보병사단을 투입하여 오산 전투를 시작으로 후속 부대 도착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지연전을 전개했다.

미 제8군 사령관 월튼 H. 워커 중장은 미 제1기병사단의 포항 상륙 이후 영동 전개에 최소 2일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윌리엄 F. 딘 소장은 대전 방어 시한을 하루 연장하고 제34연대에 제19연대 제2대대를 배속하여 전력을 증강했다.

1950년 7월 19일, 북한 공군 야크 전투기의 대전 후방 보급로 공습으로 대전 전투가 개시되었다. 미 제24보병사단은 7월 20일까지 대전을 방어하며 지연 임무를 수행하고 철수했다. 이 과정에서 대전역 내 탄약 등 보급품을 실은 화차 후송이 중요해졌고, 소장은 7월 20일 16시경 영동 주둔 사단지휘소에 화차 10량의 후송을 명령했다.

2. 2. 보급품 후송 작전과 미카 3-219호

6.25 전쟁 대전 전투에서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는 '보급품 후송 작전'에 참여하여 미카 3형 증기기관차 '''219'''호를 운전했다.[4] 이들은 7월 20일 오후 4시 30분경 이원역을 출발하여 대전역으로 향했으나, 탄수차의 총격 피해로 보급품 후송을 포기하고 옥천역으로 복귀했다. 복귀 도중 세천역 부근에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하고, 현재영 보조기관조사도 부상당했다. 이후 미군 스몰우드 하사가 기관차를 운전하여 옥천역에 복귀했다.[4]

미 육군 군사(軍史) 연구소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에 따르면,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가 대전역에 도착했다 되돌아간 이후 윌리엄 F. 딘 소장이 영동에 위치한 사단지휘소에 보급품 후송을 위한 기관차를 대전역으로 보내라는 명령을 다시 내렸다. 오후 5시에 기관차가 대전역을 향해 출발했다는 보고까지는 딘 소장이 받았지만, 대전역에 도착하지는 못했다. 이 기관차를 대전역에서 기다리던 수송장교 레이몬드 D. 햇필드(Raymond Davidson Hatfield) 대위는 북한군에게 공격당해 전사하였다.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에는 나오지 않지만, 7월 20일에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보급품 후송 작전'과 별개로 한국인 철도공무원들이 운전하는 기관차에 미군 호송병 6명이 탑승하여 또 다른 '보급품 후송 작전'을 수행하였고 이 작전에서도 기관차 운행 도중 북한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다고 보도한 미국 신문 기사가 존재한다.

INS 통신사 소속 필립 딘(Philippe Deane Gigantès) 종군기자는 1950년 7월 21일, 한국인 철도공무원 중 'switchman'(장시경 신호원으로 추정)이 참여한 또 다른 '보급품 후송 작전'이 있었다고 보도했다. 이 작전 역시 북한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보급품 후송은 실패했고, 7월 21일 오전 8시 미 공군보급품이 적재된 화차들을 폭격하여 북한군에 의한 노획을 방지하였다. AP 통신은 이 폭격을 미국 독립기념일 불꽃놀이에 비유하며 전 세계에 보도했다.

김재현 기관사가 수행한 작전의 목적은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고 대전역에 있던 보급품(화차 10량) 후방 이송 작전이었다.

2. 3. 딘 소장 구출 작전 논란

6.25 전쟁 초기 대전 전투에서 김재현 기관사 등이 수행한 작전은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아니라, 대전역에 있던 보급품(화차 10량)을 후방으로 옮기는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다.

한국철도공사는 이 작전을 '딘 소장 구출 작전'으로 홍보해 왔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미 육군 군사 연구소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및 딘 소장 회고록,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 보고서 등 미군 측 자료는 일관되게 '보급품 후송 작전'으로 기록하고 있다.[4]

대한민국 국방부 역시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와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에서 '딘 소장 구출 작전'은 와전이며, 실제로는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명확히 밝혔다. 전쟁기념관 또한 2020년 발간한 학예지에서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 보고서를 바탕으로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음을 입증했다.[6]

한국철도공사 등이 제작한 자료에서 딘 소장이 1950년 7월 19일에 실종 또는 포로가 되었고, 미군이 특공대를 투입해 딘 소장 구출 작전을 펼쳤다는 묘사는 역사 왜곡이다. 소장은 7월 20일까지 대전에서 부대를 지휘했으며, 보급품 후송 명령도 직접 내렸다. 실제 실종은 7월 20일 늦은 밤 철수 중 발생했고, 포로는 8월 25일에 되었다.

김재현 기관사의 기관차에 탑승했던 미군들은 결사대가 아니라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소속 호송병 6명이었다.[14] 이들은 보급품 후송 작전 지원 및 기관차 호위 임무를 맡았으며, 미군 사상자는 없었다.

'딘 소장 구출 작전'이 사실이었다면, 작전에 참여한 미군들은 훈장을 받고 영웅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보급품 후송 작전'이었고, 관련 자료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3. 역사 왜곡과 진실 규명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그가 운전했던 기관차 모델번호에 대한 역사 왜곡 논란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현재 김재현 기관사의 공식 순직일은 국립서울현충원 묘비, 국가보훈처 자료 등에서 7월 19일로 기록되어 있으며,[5] 1975년 동아일보 기사와 같이 과거 기사에서도 7월 19일로 보도되었다.[5] 그러나 1953년 교통부에서 발간한 '한국교통동란기'에 따르면, 생존 철도공무원들은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을 7월 20일로 증언했다. 이는 미 육군 군사 연구소의 6.25 전쟁 공식 전사 기록,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 보고서, 딘 장군 회고록 등 미국 측 자료와도 일치한다.[5][6]

이러한 혼란은 1962년 대전역세천역 구간에 건립된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에 순직일이 7월 19일로 잘못 기재되면서 시작되었다.[5] 비록 순직비 제막 당시 기사에서는 7월 20일로 올바르게 보도되었지만,[5] 순직비의 오류로 인해 이후 현양사업 과정에서 7월 19일이 공식 순직일로 굳어지게 되었다.[5]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 모델번호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현재 철도박물관에 전시 중인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미카3-129호)는 국가등록문화유산 제415호로 지정되어 있지만,[2] 여러 사료와 증언에 따르면 실제 운전했던 기관차는 미카3-219호였다.[1][2][3]

자세한 내용은 "미카 3-129호와 미카 3-219호 혼동"과 "김재현 기관사 순직일 논란"에서 확인할 수 있다.

3. 1. 미카 3-129호와 미카 3-219호 혼동

1950년 6.25 전쟁 대전 전투 당시 김재현 기관사 등이 실제로 운전했던 기관차는 미카 3-129호가 아니라 미카 3-219호였다는 사실이 여러 사료와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 미카 3-219호 증거 자료:
  • UP 통신사 (현 UPI 통신사) 소속 피터 칼리셔 종군기자의 1950년 7월 20일 보도: 기관차를 'Old 219'로 특정.[1]
  • 1953년 교통부 발간 공식 역사서 '한국교통동란기':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한 기관차를 'M3 二一九호'로 기록.[2]
  •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의 1983년 7월 20일 자필 경위서: 'MK3 219호'로 증언.[3]
  • 황남호 본무기관조사의 증언: "제가 혼자 살아 운전한 기관차 MK3 219호는 김천기관차 사무소에서 수리한 후 다시 전투에 수송업무를 한 후 20여년 사용되었으나 디젤화로 폐차되었습니다."
  • 1999년 발간된 철도청 공식 역사서 '한국철도 100년사': "미카3-219호 증기기관차를 몰고 가겠다고 김재현 기관사가 자원하였다."

  • 손길신 전 철도박물관장의 주장 비판:
  • 손길신 전 관장은 '한국교통동란기'에 세로쓰기로 쓰여진 '미카 三二二九호'를 '三-一二九'로 해석하여 미카 3-129호가 맞다고 주장.
  • 그러나 해당 부분은 대전 전투에서 김재현 기관사 등과 별개로 보급품 후송을 시도한 장시경 신호원의 공적을 서술하는 항목.
  • '한국교통동란기'의 김재현 기관사 관련 항목에는 'M3 二一九호'로 명확히 표기.
  • 손길신 전 관장의 주장은 역사 왜곡이며, 김재현 기관사가 운전했던 기관차 모델번호 논란과 관련 없음.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의 1979년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에서도 '한국교통동란기'의 장시경 신호원 관련 기록을 '미카 3229호'로 표기.


1962년 경향신문 기사[10], 1969년 동아일보 기사[11], 1975년 동아일보 기사[12] 등 당시 언론에서도 미카 3-219호로 정확히 보도했다.

결론적으로, 한국철도공사의 실수 또는 의도적인 조작으로 인해 실제 보급품 후송 작전에 투입되지 않은 미카 3-129호가 2008년 국가등록문화유산 제415호로 지정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3. 2. 김재현 기관사 순직일 논란

현재 김재현 기관사의 공식 순직일은 국립서울현충원 묘비국가보훈처 자료 등에서 7월 19일로 기록되어 있다.[5] 1975년 동아일보 기사처럼 과거에는 7월 19일을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로 보도하기도 했다.[5]

그러나 생존 철도공무원들의 최초 증언이 실렸던 1953년 교통부 발간 공식 역사서 '한국교통동란기'에서 현재영 보조기관조사는 7월 20일 16시 40분경에 대전역에 도착했었고 복귀하는 도중 북한군 총격으로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는 미 육군 군사(戰史) 연구소(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의 6.25 전쟁 공식 전사(戰史) - 'South to the Naktong, North to the Yalu' (pp. 168–169)에 7월 20일 16시 20분에 기관차가 이원역에서 대전역으로 출발하였고 역시 복귀하는 도중 한국인 기관사가 적의 총탄을 맞아 죽었다고 기술한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5] 미 제24보병사단 정보참모부(G2)의 보고서 역시 7월 20일 16시 30분경에 기관차가 대전역으로 출발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6] [https://24thida.com/books/books/Dean_general_through_capture.pdf 딘 장군 회고록 - 'General Dean's Story' (p. 37)] 역시 마찬가지로 미국 측 자료에서 일관되게 김재현 기관사의 순직일과 작전 일시를 7월 20일 16시 20분부터 17시 사이로 기록하고 있다.[5]

순직일이 7월 19일로 잘못 알려지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1962년 12월 5일 대전광역시 판암동 소재 대전역세천역 구간에 건립되었던 김재현 기관사 순직비에 순직일이 7월 19일로 잘못 들어가면서부터이다.[5]

1962년 12월 10일 순직비 제막 당시 관련 기사에서는 7월 20일에 김재현 철도 기관사가 순직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정작 순직비에는 7월 19일로 순직일이 잘못 기재되었다.[5] 그 후 철도청 시절부터 이 순직비에 기재된 순직일에 맞추어 김재현 기관사 현양사업을 진행하면서 완전히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5]

3. 3. 옥천역 복귀 운전자 논란

UP 통신사(현 UPI 통신사) 소속 피터 칼리셔(Peter Kalischer) 종군기자가 1950년 7월 20일 단독으로 보도하고 'Buffalo Evening News', 'The Atlanta Constitution' 등 수많은 미국 신문에 전재(轉載) 및 재배포되었던 기사에 따르면 옥천역 복귀시 운전자는 스몰우드 하사(Staff Sergeant Elmo Smallwood)였다.[15] 이 기사의 요지는 한국인 승무원들이 죽거나 부상당한 위기 상황에서 스몰우드 하사가 기관차를 운전하는 영웅적인 활약을 펼쳐 동료 미군 호송병 5명의 목숨을 살렸다는 내용이었다.

또한 미 제24보병사단 병참부대 보고서에도 기관사가 부상당하자 스몰우드 하사가 운전하여 옥천역으로 복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5] 이는 김재현 기관사가 순직하고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부상으로 의식을 잃은 후 황남호 본무기관조사가 기관차를 운전하여 옥천역으로 복귀한 것으로 알려졌던 국내 প্রচলিত 내용과는 다르다.

4. 역사적 의의와 교훈

미카형 증기 기관차는 1940년 일본에서 제작되었다. 6.25 전쟁 당시 대전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제 작전에 사용된 기관차는 미카3-129호가 아닌 미카 3-219호였다.[1][2][3]

이 기관차는 2008년 10월 17일 국가등록문화유산 제415호로 지정되었으며, 국립대전현충원 내 호국철도기념관에서 야외 전시 중이다.

4. 1. 한국 사회에 대한 영향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는 6.25 전쟁 당시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에 포위된 미국 제24보병사단의 보급품 후송 작전에 투입된 기관차로 알려져 왔다. 이 작전에는 김재현 기관사, 황남호 본무기관조사, 현재영 보조기관조사가 참여한 것으로 알려졌다.[1][2][3]

그러나 실제 작전에 사용된 기관차는 미카3-129호가 아닌 미카3-219호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2][3] 이러한 역사적 오류에도 불구하고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는 2008년 10월 17일 국가등록문화유산 제415호로 지정되었다.

4. 2. 한미 관계에 대한 시사점

미카형 증기기관차 129호는 6.25 전쟁 당시 한미 관계의 중요한 상징으로 볼 수 있다. 대전 전투에서 북한군에 포위된 미 제24보병사단의 보급품 후송 작전에 투입될 예정이었던 기관차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비록 실제 작전에 사용된 기관차는 미카3-219호였지만,[1][2][3] 미카형 증기기관차는 전쟁 초기 절박한 상황에서 한미 양국이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했던 역사를 보여준다.

참조

[1] 뉴스 京釜線沿邊에 새겨진『反共』 https://newslibrary.[...] 경향신문(네이버) 1962-12-11
[2] 서적 交通史編纂委員會 1953
[3] 서적 기차가 온다(p. 188) https://www.yes24.co[...]
[4] 뉴스 옥천역 복귀시 운전자는 스몰우드 하사(Staff Sergeant Elmo Smallwood)였다
[5] 웹사이트 6·25때 딘 소장 구출작전, 美 장군 구출 나선 한국 철도원들 세계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영웅' https://www.ggilbo.c[...]
[6] 간행물 '6.25전쟁사 제4권 금강-소맥산맥선 지연작전'과 '호국인물총서 (1): 6·25전쟁 개전의 순간'
[7] 웹인용 '6.25 전쟁사 제4권 금강-소백산맥선 지연작전 (p. 166) -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https://www.imhc.mil[...] 2023-04-12
[8] 웹사이트 William Frishe Dean - Congressional Medal of Honor Society https://www.cmohs.or[...]
[9] 웹사이트 William Frishe Dean - Hall of Valor: The Military Medals Database https://valor.milita[...]
[10] 웹사이트 손길신의 驛史(역사)이야기 12화 - 태전역(太田驛)으로 시작된 대전역(大田驛) https://www.megaecon[...]
[11] 웹사이트 나라위해 끝까지 달렸다 빗발치는 총탄 뚫고 https://kookbang.dem[...]
[12] Youtube 6.25 남북전쟁의 숨은 영웅, 철도 기관사 김재현 https://www.youtube.[...]
[13] 문서 6.25 전쟁에서 미 해병대의 한국 전개는 제1임시해병여단이 8월 2일에 부산에 도착하면서부터이다.
[14] 서적 미군 호송병 6명의 한글 이름과 계급은 배은선 철도박물관장이 저술한 한국철도 역사책 '기차가 온다' (pp. 187–188)에서 차용
[15] 뉴스 '딘 소장 구출작전' 아니었다…6·25 그날, 기관사 죽음의 진실 - 이철재의 밀담 https://n.new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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